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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아바이 동네- 흔들바위- 울산바위로 4.

등산.산,여행

by 영구[영원한 친구] 2023. 1. 25.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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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바위 정상부. 

    속초 먹거리촌,굴 전문식당에서 해물 모듬을 주문 하였다.조개구이,생굴.돼지고기 수육,전복회 등이다.

 숙소를 정하고 늦은시간에 속초 아바이 마을 방문.

    바다와 연결된 청초호

 갯배가 오고있다. 청호동과 중앙동을 5분거리에 운행하고 있다

     금강대교의 야경.

    갯배의 요금표.

    아바이 마을 가게. 한산하지만 오징어 순대, 아바이 순대.생선구이등 여러 음식을 팔고 있다.

 설악대교의 야경.

     속초 안내도.

 가을동화로 유명해진 갯배.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갯-배지요.

            갯배 승선.

      갯배는 무동력이라 줄을 통해 오가고 있다

           송승헌[윤준서]과 송혜교[윤은서] 의 가을동화 촬영지

              당시 원빈은"얼마면 돼? 얼마면 널 가질수 있어? 명대사를 남기기도 하였다.

     은서네집. 예전에는 슈펴인데 지금은 순대가계로 바뀌어져네요.

       저녁을  이곳에서 먹어야하는데 먹거리촌에서 먹고와서, 아바이 순대와 옥수수 동동주를 구입.

        설악대교 밑이 청호동 아바이 마을 입구.

숙소에서 시식  아바이 순대와 강원도 옥수수 동동주.

        다음날 설악동 도착.

설악산 국립공원 입구.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 반달곰 동상에서

 신흥사,울산바위로 이동.

     권금성이 조망되고 케이블카도 운행중이다.

         달마대사 머리와 닮은 달마봉과 권금성 일대[우]

        설악산 지구 전적비.

        조국과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위해 돌진하는 국군의 용감한 모습을 조각 전적비 위에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설악이 여기에 없었더라면 어찌 향로와 건봉이 저기에 있으리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바친 젊은이의 넋이 서려 있는 곳 호국 영령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자.

    소공원내의 5층석탑.

설악동지구, 외설악구역.

     설악산 국립공원 안내도.

   설악산 신흥사 일주문.

      통일대불 청동 좌불상,

  뒷로가면 몸속 법당[내원 법당]가는 통로가 있다.

   청동 석등.

   부여박물관에서 백제금동 대향로를 본뜬 모조품 청동 향로.

      용머리 난간

    사천왕문.

   비파를 든 지국천왕,                       금강 검을 든 중장천왕.

여의주와 용을 쥔 광목천왕, 보탑을 들고있는 다문천왕.

   보제루.

  극락보전.

      거북이 감로수.

        신흥사 경내.

한국 불교 최고지도자 고암스님 부도탑.

 
"困果는 분명한 법…조심해서 살거라"
 
현대 한국불교의 고승인 고암(古庵)의 본관은 양주 윤씨이다.
어릴때 이름은 지호(志豪)였으며, 법호가 고암이고, 법명은 상언(祥彦)이며,
자호는 환산(歡山)이다.
고암은 1899년 10월 5일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식현리에서 아버지 문과 어머니 정원행
(鄭原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9세부터 12세 때까지는 서당에서 한한을 익혔고, 13세에는 적성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1915년 여름 우연히 행각승을 만나 회룡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인연으로 화계사에서 수개
월간 머물렀다.
 
고암은 1916년 가을 서울 사동 포교당에서 설법하던 용성(龍城)스님의 금강경 법문을 듣
고 발심하여 망월사에 갔다가, 이듬해 7월 해인사에서 제산(霽山)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그후 고암은 화장사(華藏寺)에서 동안거를 했는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화장사
대중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그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심원사, 석왕사, 신계사, 건봉사, 유점사, 마하연사, 표훈사,
신흥사, 불영사, 고운사 등지에 머물면서 선 수행과 교학공부를 겸했다.
1920년 봄에는 통도사 극락암에서 혜월 화상을 친견하고 좌선에 몰두했다. 
1921년 고암은 망월사에서 열린 용성 선사의 선회(禪會)에 참석했고, 서울 대각사에서 사교(四敎)를 배웠다.
1922년 봄에는 오대산 상원사에서 정진했고, 8월에는 문경 대승사, 금룡사, 용문사 등을 거쳐 해인사로 가서 용성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예산 정혜사로 가서 만공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으며, 이듬해는 백양사 운문암에서 용성 선사의 지도아래 동산,
석암, 금포 등과 함께 정진했다.
이때 고암은 오후불식과 묵언정진을 했으며, 특히 전강선사와 친하게 지냈다.
그 후에도 그는 직지사, 수도암, 지리산 칠불암, 망월사, 천성산 내원사 등지에서도 묵언하면서 용맹정진했다.

이처럼 각처 선원에서 치열하게 정진을 계속하던 고암은 내원암에서 정진하던 무렵 첫 깨달음의 희열을 경험하고 선정삼매
는 항아리 속의 일월과 같고(禪定三昧壺中日月), 시원한 바람이 부니 가슴 속엔 근심이 없네(凉風吹來胸中無事) 라는 오도
송을 읊었다. 


한편 고암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만공 선사를 모시고 정진할 때, 그는 선방에서 제법 알아주는 고참 납자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암은 누구나 기피하는 공양주 소임을 자청하여 궂은 일을 도맡아 했으며, 엄동설한에도 대중들의 신
발을 남몰래 깨끗하게 닦아놓고 새벽이면 세숫물까지 데워 주었다.

1938년 여름 고암은 내원사 천성선원에서 용성선사 지도를 받으며 정진하다 문득 새로운 세계가 열려짐을 느껴 법거량을
청했다.

용성이 “조주(趙州) 무자(無字)의 열가지 병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묻자, 고암은 “다만 칼날 위의
길을 갈 뿐입니다(但行劍上路)”라고 답했다.

이에 용성이 다시 “세존이 영상회상에서 가섭에게 연꽃을 들어 보이신 뜻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고암이 “사자 굴에는 다른
짐승이 있을 수 없습니다(獅子窟中無異獸)” 라고 답했다.
 
다시 용성이 “육조스님이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다만 마음이 움직
이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고암은 지체없이 일어나 세 번 절을 한 뒤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습니
다(天高地厚)” 라고 답했다.
 
마침내 용성은 제자의 견성(見性)을 인가하고, 만고에 풍월을 아는 자 누구인가(萬古風月知音者誰), 고암을 독대하니 풍월이
만고로다(古庵獨對風月萬古) 라고 읊고 법호를 지어주었다.
 
 
이후 고암은 1939년부터 해인사, 백련사, 표훈사, 직지사, 범어사 등지의 선원에서 조실을 역임했다.1944년 2월에는 해인사에서 대선사 법계를 품수했으며, 1945년 10월에는 나주 다보사 선원장에 취임했다.
이후 고암은 1954년까지 10여년 동안 전국 각지와 제주도에서 포교에 전념했다.

또 고암은 용성 선사로부터 율법을 전해 받았고, 제산과 한암의 율맥도 이어받았다.그리하여 그는 율법 전수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각처에서 보살계를 설했다.
1952년에 고암은 해인사에서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으며, 1955년 8월에는 마산 성주사 주지로 취임했다.
1958년 9월에는 직지사 주지로 취임하여 교단정화운동에 비구측의 중요한 일원으로 활동했다. 1960년에는 해인사 용탑
선원 조실로 취임했고, 대처승측의 사찰 재탈취 기도에 맞서 제주도 지방을 담당해 적극 활동했다.

고암은 사찰의 주련을 한글로 쓰고 선원에 스님과 일반 신도들이 함께 수행하도록 했다.그는 평소에도 기도와 송주를 많이 했는데, 목에는 언제나 108염주가 걸려 있었고 앉으면 늘 염주를 돌렸다.

1967년 7월 고암은 대한불교조계종 3대 종정에 추대되었으며, 1972년 7월 제4대, 1978년 5월 제6대 종정을 역임했다.그는 신년법어, 부처님 오신날 법어, 하안거와 동안거 결제와 해제 법어 등을 통해 불법의 진리를 대중들에게 알리기에 힘
썼다.
특히 그는 보살계산림, 군불자포교, 해외포교 등에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진력했다.

고암은 인간정신의 회복을 강조하면서 ‘원각경’을 인용하여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가 청정해진다(心淨卽國土淨)”는 법문을
자주 했다.
또 그는 “본래 참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시방세계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으며, “금가루가 귀한 것이지만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된다”는 법문도 즐겨 했다.

한편 고암은 신도들이 특별한 예물을 공양하면 얼마뒤 그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언제나 빈손이었다.그리고 평생 옷이 두벌 밖에 없었으며 만년까지도 손수 빨래해서 입었다.

고암은 1980년 2월 용성 대종사 문도들의 모임인 용성문장(龍城門長)이 되었으며, 5월에는 신임 총무원장 월주에게 종단
사무를 인계하고 3년동안 끌어오던 종단 불화사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고암은 종정직을 사임한 후 제자 대원이 하와이에서 해외포교에 나서자 그곳에 가서 머물렀다.이때 고암은 손수 공양을 지어 마지를 올리고 대중에게 공양하는 수행자의 본분사를 여실히 행했으며, 한달에 대여섯 번 법
문을 하는 열성을 보였다.
또 그는 1985년 3월에는 인도와 동남아 여러나라를 전법 순력했으며, 7월에는 호주에서 국제보살계단 전계사로 법을 설했
고, 유럽과 미국도 방문해 그곳의 한인불자를 위해 보살계를 설했다.

1988년 미국 산호세에 있는 한국 사찰에 설법하러 가다 일어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앓다가 귀국한 고암은 10월 25일 해인
사 용탑선원에서 ‘가야산에 단풍이 짙게 물들었으니(伽倻山色方正濃), 이제 천하는 가을이로다(始知從此天下秋), 상강이라
낙엽지면 뿌리로 돌아가고(霜降葉落歸根同), 구월의 보름달은 허공에 빛나네(菊望月照虛空)’라는 임종게와 “조심해서 살거라.
이 세상 모든 것이 인과는 분명한 법이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세수 90세, 법랍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10월 29일 종단장으
로 영결식을 봉행하고 연화대에서 다비하니 영롱한 사리 16과가 나왔다. 이듬해 문도 70여명이 부도탑과 비를 세웠다.

고암은 평생을 자비와 겸손으로 일관했으며, 인자한 성품과 항상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행(下心行)을 실천한 고승이었다.또 그는 맑고 깨끗한 삶을 산 큰 스님으로서 천진하고 순박한 모습에 항상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자비보살이었다.
특히 고암은 한 곳에 6개월 이상 머물지 않고 늘 만행하면서 설법과 교화에 전념한 위대한 율사이자 선객이었으며, 3번이나
종정을 역임한 한국 현대불교사의 최고지도자였다.

     울산바위가는 길목의 안양암

     법당앞에 잠시 휴식.

화강암석의 울산바위가 조망된다.

     계조암 앞의 너럭바위.

     계조암내의 흔들바위.

 흔들바위에서 인증샷.

    울산바위와 목탁모양바위의 계조암 석굴 법당.

    울산바위와 흔들바위의 조화속에서

    바위옆 진열대 아저씨의 도움으로  인증샷,  4000원 칡차 한잔 사진값으로 대용.

        다정스럽게 웃으세요

     옆의 나무가지를 보고 흔드니 움직 이네요.10명,1명 움직이는것은 똑 같다 합니다.

    바위바닥과 암벽에 시인 묵객들의 필체가 많아 그중에 유명한 사람도 있네요.  남공철.

남공철은 교과서에 이름이 비치는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조선 후기 우리 정치사에 중요한 인물이므로 그의 약력을 먼저 알아본다.남공철1760(영조 36) ~ 1840(헌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 · 금릉(金陵). 서울 출신. 아버지는 대제학 유용(有容)이다. 1780년(정조 4) 초시에 합격하고, 1784년(정조 8) 음보로 세마(洗馬)에 등용되어 산청(山淸)·임실(任實) 등의 현감을 지냈다.

1792년에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이어 홍문관부교리 · 규장각직각에 임명되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정조의 지극한 우대를 받았다. 초계문신에 선임되었으며, 친우이자 후일의 정치적인 동지인 김조순(金祖淳) · 심상규(沈象奎)와 함께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운동에 지목되어 그 뒤 순정한 육경고문(六經古文)을 깊이 연찬함으로써 정조치세에 나온 인재라는 평을 받았다. 정조 때에는 주로 대사성으로서 후진교육 문제에 전념하였다.

순조즉위 뒤 《정종실록》편찬에 참가하였으며, 아홉 번씩 이조판서를 제수받고,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807년(순조 7)에는 동지정사로서 연경에 다녀왔고, 1817년에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간이나 재상을 역임하였으며, 1833년에 영의정으로 치사하여 봉조하가 되었다. 평소에 김상임(金相任) · 성대중(成大中) · 이덕무(李德懋)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독서를 좋아하였고, 경전의 뜻에 통달하였다. 구양수(歐陽修)의 문장을 순정(淳正)한 법도라 하여 가장 존중하였고, 많은 금석문 · 비갈을 남긴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순조 · 익종의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수하였고, 저서로는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자편의 시문집으로는 《귀은당집(貴恩堂集)》 · 《금릉집》 · 《영옹속고(穎翁續藁)》 · 《영옹재속고(穎翁再續藁)》 · 《영은문집(瀛隱文集)》 등이 있다

※洗馬 : 조선 시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두었던 정구품(正九品) 벼슬. 동궁을 모시고 경호하는 일을 맡아보았으며 좌우 각 한 명씩 두었다.

경주 계림비각내 비문을 영의정 남공철이 비문을 지었다.

              목탁바위 밑의 석굴 법당.

    계조암 석굴 설명문.

       삼성각.

     바위위에 소부처상도 모셔 두었다.

         신통제일나한석굴

   흔들바위 전경.

      흔들 바위의 탄생.

          울산 바위로 이동.

     울산 바위 전설.

   울산바위 전망대 해설1

   울산바위 전망대 해설2

      전망대 난간에서 잠시 휴식

        울산 바위의 위용.

저 멀리 대청봉-중청봉-소청봉, 공룡능선도 조망 된다.

   소나무 좌,우 달마봉과 대청봉.

 너덜지대의 황철봉도 조망된다.

      대-중-소청봉,그 하단에 공룡이 금방이라도 움직일것 같다.

      울산 바위 전망대.

    울산 바위능선이 2km나 되며 둘레는 4km 수직 암벽이다.

   신선대 화채봉 권금성

    한쪽방면의 소나무.

    황철본 능선과 중간머리털처럼 생긴 능선

      수직암벽 바위

    철계단으로 정상까지 연결되어있다.

    바위틈새에 자란 소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깍아지른 절벽으로 조심스레 올라 옵니다.

 정상 이 얼마남지 않는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중청봉을 바라보는 개구리 바위.

     곰바위?도 대청봉을 바라보며 호랑이 바위를 생각 하나요?

  철계단이 둘려가면서 오르기 편하게 설치 되었다

등로를 오르는중에도 아른다운 풍경을 담습니다.

     쉼터 의자에 지친다리를 쉬게 해 줍니다.

   6개의 거대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고,기이한 봉우리가 울타리를 설치해놓은것과 같은데서 유래 돼다고 합니다.

         정상이 다와 갑니다.

 여기서 보면 자라바위처럼 생겼네요.

   정상도착  속초와 동해 바다가 보입니다.

     미시령 동서 관통도로와 학사평 저수지

  서울-속초간 1시간40분대 주파.미시령 터널을 뚫고,미시령 관통도로가  개통되어 달립니다. 요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울산바위정상. 해발 873m 수직 암릉 입니다.

        매점 아저씨의 권유로 인증샷.

    주먹을 쥐세요.

      다시한번 주먹을 쥐고

      삼성그룹 이모회장 부렵지 않습니다. 아저씨의 말씀이 우습지만 시키는 포즈로

    울산 바위의 정기를 마시라하고, 칡차5000원주고 한잔 마시고 정상이라 1000원 up.

    아침 동해일출시 햋빛으로 인해 울산바위가 하얗게 보여 수정바위라고 하기도 합니다.

  자라바위에서

  하산하면서 풍화혈이 새겨진 바위로

    길이가 2km, 일부에서는 저곳까지 암벽등산도 한다고 합니다.

    미시령터널을 지나  오니 울산바위의 경관이 바로 보입니다.

  풍화혈 설명.

  풍화혈이 생긴 바위바닥.

          울산 바위정상과 간이 매점.

   도로건너 고성군 토성면.

    고성 바다쪽으로 줌을 당겨본다.

   대청봉능선

      두군데서 찍은 울산바위

       조심스레 신흥사로 하산.달마봉이 보인다

    비선대,금강굴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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