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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근계리 용운사 입불상(2)

경주방면 여행 및 산행

by 영구[영원한 친구] 2022. 12. 2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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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사적 제 30호]

잘다듬어진 잔디위에 무인석, 문인석 석상이 서 있다.

서역인의 형상를 한 무인상, 괘릉 원성왕 왕릉의 서역인과 비슷하다.

서역인의 모습을 한 또 다른 무인상.

1977년 국립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 사무소의 발굴 조사때, 상당수의 비석조각과  함께"흥덕"이란 새긴비석 조각이 나와 흥덕왕 왕릉으로 명명.

관복을 입은 문인석.

또 하나의 문인석.

명품소나무 옆의 문인석.

신라 역대왕릉 중에서 규모가 크고,형식이 완전히 갖추어진 왕릉이다.

흥덕왕과 왕비 정화부인의 애틋한, 천년 사랑 순애보는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왕릉주위를 호위하는 사자상.

괘릉에도 2쌍의 사자상이 세워져 있고, 이곳 왕릉의 사자상은 봉분앞에 1쌍, 봉분 옆에 하나가 세워져 있다.

내가 보기에는 꼬리짦은개, 동경이 같이 생겼는데...

왕릉주위에는 돌기둥이 세워져 보호하고,기둥을 연결 지지 하는 난간은 없다.

제단석.

둘레 호석에 새겨진 12지신상은  입체감이 돗보이는,부조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12지신상 중 "오[말]"

12지신상 중의 하나인 "미[양]"

12지신상 중 "신[원숭이]

12지신상 중 "유[닭]

12지신상 중 "술[개]"

12지신상 중 "해[돼지]

12지신상 중 "자[쥐]

12지신상 중 "축[소]

12지신상 중 "인[호랑이,범]

12지신상 중 "묘[토끼]

12지신상 중 "진[용]

12지신상 중 "사[뱀]

사자상.

왕비인  정화부인은 소성왕의 딸이니, 흥덕왕에게는 조카가 되는셈 인데,흥덕왕 즉위 2개월만에 사랑하는 왕비를 잃게된다.

왕비가 죽자 신하들은 왕조의 흥왕을 위해 재혼하라고  권유하지만,재혼을 거부하고 모든 즐거움을 멀리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10년 후 왕비와 합창하라는 유언을 남긴후, 세상을 떠나게 되니 이곳에 왕비와 함께 합장되게 한다.

살아서는 너무나 짦아 안타까운 사랑이지만,죽어서는 영원히 함께 부르는 천년의 사랑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어느 부부의 한적한 나들이.

사자상은 오늘도 제자리에서 천년의 사랑을 호위하고 있다.

소나무도 이들의 사랑을 아는지 함께...

커다란 눈망울의 사자상은 무엇을 응시하는지...

두 대의 차가와서 말끔히 잔가지를 손질하고 있다. 갑자기 왕릉 주위가 탁트인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서로 마주 보고있는 문 무인상.

삼국유사 왕력편에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는데,왕비 정화부인과 함께 매장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왕릉 아래자락에  커다란 귀부가 자리잡고 있다.

이수와 비신이 멸실된채로 남겨진 귀부가, 왕릉의 규모에 걸맞게 매우 거대하게 조성 되었다는 것을 알수있다.

오랜 세월동안 방치속에 머리부분이 크게 깨진방면에, 귀부는 바닥에 장방형 으로 만들어져 있고 등에는 갑문양을 두르고 있다.

거대한 귀부의 모양으로 볼때 비석의 크기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짐작 된다.

귀부의 조각 수법은 성덕왕릉의 귀부와 유사하다.

헌덕왕의 뒤를 이어, 신라 제 42대 왕인 흥덕왕은 10년간 재위하였고, 죽을때 후사가 없었고 결국 그의 사후에 왕위를 둘러싼 골육상쟁이 생겼다.

육통2리 회관.

능골마을 안내문.

육통회화나무 가는 길.

회화나무.[천연 기념물 제318호]

월성 육통리 회화나무 안내문.

나이가 650년 으로 높이 17m, 둘레 5.9 m인 회화나무

옛부터 회화나무를 집에 심으면,가문에 큰 인물이나 큰 학자가 나온다고하여 길상목으로 불렸다.

그 옆에도 오래된 향나무도 보인다.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이 나무앞에 제사를 지내며,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기원한다고 한다

육통3리마을 버스 승강장.

일단 700번 버스를 타고 안강서부터미널이동.,212번버스 종점인 금계2리 마을로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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