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절터의 모습은 찾을수 없지만,그래도 절터임을 확인 할수있는 쌍탑만이 신라의 예술성을 간직하고 있다.
12지신상과 사천왕이 새겨진 동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높은 조각수준을 알려주는 수작이다.
동 삼층석탑의 사천왕상.
촣몸체돌 사면에 새겨진 사천왕과 12지신상.
동서 삼층석탑은 1931년경 복원. 조선말기까지도 법등이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단의 기단위에 3층으로 쌓아올린 석탑은,전체 높이 7m 이며 상륜부는 노반과 앙화까지만 남이 있다.
원원사지 동 삼층석탑.
원원사지 서 삼층석탑.
두 개의 석탑은 규모와 양식이 거의 동일하며,각 부분의 세부표현 까지 유사하다.
하층 기단의 각 면에는,우주와 2개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고,그 위에 하층갑석이 놓여있다.
상층기단의 각 면에서도,우주와 2개의 탱주가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 역시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12지상은 모두 좌상으로 머리는 동물이고, 몸은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평상복을 입고 있다.
동서 삼층석탑과 석등.
옥개석과 탑신의 파손이 심하며,사천왕상과 12지상 중 찾아내지 못한 상도, 여러개 있지만 비교적 완전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구 원원사지 배치.
석등.
연꽃무늬의 석등기단부.
1809년 금당지 앞에 묘를 쓴 울산의 모 몰지각한 민묘가 자리잡고 있다.
강당지에도 민묘1기가 보인다.
동경잡기>(1669)불우조에 따르면 인조8년인“숭정(崇貞)경오년(庚午年, 1630)에 중수하였으나,26년 뒤인 효종7년(1656)에 원원사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곧 중건되었다”라고 하였다.따라서 조선후기까지 법등이 계속 이어졌으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절은 극도로 황폐화되어 있었으며,특히 불교를 배척하던 시기이자 사찰은 모두 명당터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인식이 일반적으로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까닭에1809년에는 금당지 앞에 묘를 쓴 울산의 모 사람들이 동서 삼층석탑을 무너뜨려서 부근의 낮은 곳에다 버렸다고 한다.
현재도 쌍탑과 금당사이의 가운데에 당시의 민묘가 자리하고 있으며 강당지에도 민묘1기가 있다.
그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절터는1927년당시 불국사에서 여관업을 하고 있던 일본인 쓰기야마신조(杉山信三)에 의해 삼층석탑이발견되어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이미 무너져 주변에 흩어지거나 계곡에 내밀려 있던 석탑부재들을 수습하여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공학부 건축학교실 조수노세우시조오(能勢丑三)가1931년 가을에 복원한 것이다 [폄]
▲1931년 복원당시 모습
▲1931년 복원당시 모습
경도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교실 조수.[노세우시조우]
▲1931년 복원당시 모습
▲1931년 복원당시 모습
▲1931년 복원당시 모습
▲1931년 복원당시 모습
[폄]
원원사는 통일신라시대 문두루비법의 중심도량이다. 명랑법사에 의해 처음으로 신라에 전해진 신인종. 호국밀교 사찰로 건립 되었다.
원원사 뒷 모습.
용왕각.
용왕님.
장군복장의 용왕님.
동백꽃.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 합니다.
원원사는 신라 신인종의 개조 명랑 법사가 세운 서천왕사. 금광사와 함께,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문두리비법"의 중심 도량이었던 호국사찰 임.
봉서산 사조암. 문두리비법 밀교를 계승한 4대덕[안혜.남융.광학.대연]유골이 절의 동쪽 산봉우리에묻혀있다 하는데 이 곳이 아닐까요?
신인종 밀교 종파.신라시대 4대덕[안혜 남융 광학 대연]김유신 김의원 김술종에 의해 창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