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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5.

경주방면 여행 및 산행

by 영구[영원한 친구] 2022. 12. 25.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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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

화산곡지 제방.

제방아래 한옥주택.

청보리밭.

두류길 364 지점.

지나온 두류공단.

화산곡 저수지.

수준점.

저수지는 만수위 상태.

저수지 둘레길로 이동하니 조립식 건물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고 아저씨 한분이 보이신다.

개가짓고... 길을 정리하시고 있다. 금곡사 문의해보니 아직 2.5km 남았다고 한다.

귀산과 추항이 원광법사 만날때도 이렇게 깊은 산중에 은거 하셔는지...저수지 둘레길을 계속 오른다.

두류길 490.

금곡사 2.3 km 더 걸어야한다.

산길 시멘트길 비온뒤의 낙엽길을 걷는다.

버섯의 자생.

두 갈래 길이 나타나 좌측으로 이동.

"나는 자연인 이다" 집인가?  이 산골짝에 웬 집인고?

머하는 조형물이지? 쉼터?

잠시 후  적재한 독강.

다리가 나타나고 주위는 금곡사지 주차장.

산언덕을 보니 절집지붕이 보인다.

축대는 돌 담장으로 구성.

낙엽싸인 계곡에 한자락의 물줄기가 흘려 내린다.

두개의 석재가 세워져 있다. 거리가 너무 멀다.

번지수 두류길 758 지점.

금곡사지와  원광법사 부도탑 전경.   산사는 침묵속에 잠겨있다.

나한전과 요사채. 스님도 보이지 않고 고독한 탐방객만 산사를 배회한다.

원광법사 부도탑 안내문.

주위는 공사해서 그런지 새롭게 단장된 모습이다.

원광법사는 신라 화랑의 생활지침이 되었던, 화랑세속오계를 지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큰 기여를 한 스님이 아닌가!

원광법사[553~637]는 금곡사에서 수도를 하고, 589년에는 중국의 진나라로 유학, 전도와 교화로 이름을 떨쳐 중국의 당속고승전에 실렸다. 

11년간 유학에서 660년 귀국, 신라 국민뿐만 아니라,진평왕도 면대해서 공경하고 성인처럼 높였다.

귀국하여 잠시 가실사에서 귀산,추항 에게 화랑도 화랑오계를 가르쳐 주었던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 이다.

요사채.

신라삼국통일 주역을 담당한  화랑들에게, 그들의 정신적 도덕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생활지침을 제공 했던것이다.

608년 왕의 요청에 의해 수나라에 걸사표를 지었으며,말년에는 왕이 손수 의복과 약물등을 마련해 주었다.

637년 임종하자 장례도구를 내리어,임금의 장례와 같이 했다. 그의 부도[우리나라 최초의 부도]는 금곡사에 안치 했는데,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부도의 일부가 파괴 되었다.

예전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에 약사전이 자리잡고 있다.

삼성각.

이 금곡사지에 있는 부도탑을 보기 위해서 먼 길을 걸어온 것이다.

산위 나무옆의  삼성각.

나한전.

나한전 옆의 약수터.

산신각에 계시는 산신령님인지  용왕님이신지...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7호]  원광법사의 부도로 알려져 있다.

1층 몸돌 4면에는 4각형의 문틀을 새기고 파내어 불상을 안치하는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앉아 있는 불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원광법사는  속성이 박씨, 또는 설씨로 80세 혹은 99세를 살았다고 한다. 화랑도의 생활신조가 된 세속오계를 지어주고, 수나라에 보낸 걸사표를 지을 정도로  불교사상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능하였다.

 신라 진평왕52년[630]에 황룡사에서 돌아가시자  명활산에 장사 지내고,

삼기산 아래 금곡사에 부도를 세웠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탐방을 마치고 다시 내려간다. 입구에서 제법 먼 길을 들어와 요새와 같은 산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홀로 수행한 스님의 큰 뜻은 무엇일까?

다시 해가지기 전 부랴부랴 저수지 길을 내려간다.

벌써 어둠이 내린다.

마침 두류1리 버스 종점에 있으니 바로  202번 버스가 도착한다.  원광 법사님의 보살핌인가?                   오늘도 무탈 산행에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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