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터미널 동양고속 09시 출발.요금 3800원 건천ic지나 09시50분 하차. 버스는 다시 건천ic를 올려 부산으로 이동. 요즘은 버스가 ic를 빠져나와 손님을 내리거나 태우며 다시 올리고 가니 편리 하네요. 날짜와 시간은 맞지 않습니다. [지금은 폐지 되었음]
건천ic올라오는 도로.
시간표
건천 간이 매표소.
벚꽃사이로 건천ic모습이 보인다.
의사 일천 정수기선생 기념비.
경북일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신 독립 운동가. 선생의 고귀한 애국애족정신에 머리를 숙일따름이다.
길가에 꽃망울을 맺히는 나무.
아침부터 이슬비가 내리더니 조금씩 비가 개이는것 같다.
송선리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입구에 정공의 효를 기리는 비석이 건립되어 있다.
벚꽃의 절정.
화사함의 극치.
고속 전철이 지나간다.
송선리 한옥마을옆 계곡을 따라 이동 한다.
산불감시초소가 나온다.
성암사 절이 보이고 대웅전 만 있다.
계곡의 돌탑들.
밤에 내린비로 소폭포를 이루어 흘려 내린다.
시맨도로로 계속가면 만교사로 가는 길이다.
절앞에서 우회 수로 위로 이동.성암사는 아담한 가람이다.
산행 입구는 시그널이 즐비하다.
잠시 후 전망바위에서, 품산 저수지와 건천이 희미하게 보인다.
571m봉.
줌으로 댕겨보니 복두암이 희미하게 조망된다.
한참 후 부산성 동문 방향의 성터가 나타난다.
멧돼지들의 목욕탕.
성밖으로 나가는 암문[비밀문]? 성터는 무너졌지만 흔적은 남아있음.
안내표시판은 없고, 조난위치가 표기되어 세워져 있다.
참꽃이 군데군데 피워있다.
천지못
아담한 돌덩어리
계곡아래 만교사 절이 보인다.
줌으로 댕겨본 만교사.
산정상에는 고냉지 채소밭도 보인다.
부산성 고냉지 채소밭.
전망바위에서 한 컷.
전망바위일대는 바위 군락지 이다.
여근곡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다. 소방서 04 지점이다.
조망 바위위의 소나무.
여근곡이 바로 아래 보인다.
저 멀리 산업폐기물 시설공장과 흰색의 반원형은 폐기물을 덮은 천막이라 합니다.
신평리 마을과 3개의 저수지.
지나온 능선 .오봉산은 낙타등처럼 생긴 형상의 5개의 봉오리라 하기도 함.
조망 바위 에서
조망바위일대에는 산세가 무척 험하다.
주사암으로 가는 도로와 만난다.
거대한 바위.
얼굴바위.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코끼리 바위라 하는데 ...모습이 아님.
바위위에 위치한 오봉산 정상석.
오봉산 정상석
정상석 옆면에는, '산에 남기는 것은 발자국, 가져가는 것은 추억 뿐' 새겨진 글자가 인상적이다.
주사바위. 근처에서 제일높다하는데 그 밑이 주사암 이다.
정상 밑은 묘소이다.
바위사이로 절이 보인다.
큰 암벽이 절을 수호하고 있는 느김이다.
바위동굴의 동자승.
암벽안의 동자승.
목탁위의 동자승.
큰 법당. 대웅전
큰 법당 인 관음천불전.
주사암 편액.
주사암은 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의상대사 에 의해 창건. 법당을 기준으로 삼면이 바위로 둘러쌓인 아담란 가람이다.
주사암의 이름에 대한 유래는,주암에 거주하는 한 노승은 "아무리 경국지색의 미녀가 와도 나의 수도를 어찌할 수가 없을것이다." 라고호언장담을 했는데 이에 귀신들이 노승을 시험하기위해 밤마다 궁에서 아름다운 궁녀를 납치해 노승가까이에 두었는데 귀신과 노승이 서로 도력을 겨루는 동안 매일밤 궁녀들의 때아닌 외출은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왕은 크게 노하여 궁녀들에게 "만약 납치된다면 그 주변에 붉은 모래를 뿌려 표시하라."명했고 경주 일대를 뒤지던 군사는 오봉산 까지 이르게 됐고 어느 굴 앞에 붉은 모래가 한움큼 흩어져 있는 것응 발견, 굴 에는 노승 한분이 수도하고 있었는데 군사들은 이 노승이 궁녀들을 유인한 것으로 보고 죽이려 했으나 노승의 주변에 신병 들이 나타나 이를 제지.왕은 이 노승이 부처의 보호를 받는 고승임을 깨닫고 궁으로 불려 국사를 삼았고, 노승이 있던 굴을 넒혀 절을 지어으니 이 암자가 지금의 주사암이 되었다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붉을 "주" 모래"사"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과 16 나한전을 모시고 있다.
범종각.
측면의 마당 바위.
시계가 흐려 아쉽지만 맑은 날은 경치가, 아주 좋아서 주변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오봉산의 명물인 마당 바위는 지맥석이라 불리기도하며,산정 위에 우뚝선 평탄한 반석으로 마치 멍석을 깔아 놓은 듯한 암반으로, 신라 김유신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 하던곳 이라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며 곳곳에 움푹패여 들어간 자리들은 말발굽의 흔적이라 한다. 100명 가까이 편히 앉을수있는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