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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동 마애여래입상-헌덕왕릉-진평왕릉-황복사지 삼층석탑-홍유후 설총묘2.0

경주방면 여행 및 산행

by 영구[영원한 친구] 2022. 12. 3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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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후 설총묘소.

상사초

숭신전 옆 뒤길로 동천동 마애여래입상으로 방향 중 좌측바위로 접근한다.

두 개의 바위가 있지만 좌측바위만 입상이 없고...

좌측 바위상부 돌틈이 보이고.

우측의 큰바위에 새겨져 있다는데...불심이 없는지 보이지 않는다.

일단 사진을 폄 한다.동천동 마애여래입상.

동천동 마애여래입상 [폄]

비지정 문화재라 아무리 관찰해도 보이지 않음. 맑으면 보이는가?

닭이랑 식당의 염소

식당 사장님께 문의하니 위쪽에 ,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한다.

비가 조금씩오더니 많이 내리기 시작한다. 나팔꽃의 행진.

인동초.

알리움 [멀어지는 마음,무한한 슬픔]

가을 태풍이 올라오고 있는 가운데 ,비에 젖은 벼는 고개를 숙이고...

불국 유치원.

경주 변전소.

멀리 논 중앙 평지 소나무숲 사이로 왕릉이 희미하게 보인다.

논둑길 사이로 해서  왕릉으로 접근한다.

신라 제 41대 헌덕왕릉.

헌덕왕릉 안내문

왕릉 주위의 12지장 둘레석은 5개만 남아있다.[쥐상]

조선 영조 18년 북천에 태풍과 홍수로 북천이 범람하자, 평지위의 헌덕왕릉이 무너져 그 때 유실되어 없어졌다.[돼지상]

하단의 지대석,넓은 면적의 좌,우판석,12지신상이 조각되어있는 탱주[지신상 없음], 상단의 갑석. 그리고 봉분이 형성.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809년에 왕이되어 826년 까지 18년간 왕위를 재위하면서 농사장려 친당정책을 폈다.

애장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된 후, 사후에 북천의  잦은범람으로 왕릉이 잠기고 둘레석이 유실되고...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신라 헌덕왕릉 비석.

헌덕왕릉 가는길.

비로인해 북천이 범람하여,징검다리를 포기하고 구황교로 이동.

구황교를 건넌다.

구황동 신라왕경 숲 조성사업 비.

구황동 분황사지구 왕경숲.

보문마을 입구 안내석옆, 홍유후 설선생묘소 진입로 안내석이 서 있다.

보문마을 방면으로 이동중, 명활성에서 진평왕릉 오는 이정표.

진평왕릉 가는길에는, 세월의 무게를 가늠케 하는 노거수가 자리잡고 있다.

수백년이나 될즘한 왕버들 나무,팽나무, 소나무 사이로 왕릉이 살짝 비친다.

보문동 벌판 평지위에 자리잡은 신라 제 26대 진평왕릉.

문화유산을 보는 안목을 높일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좋은 유물을 좋은 선생님과 함께 보면서 배우는 것이다.

내게 경주를 제대로 가르쳐 준 분은 정양모선생이었다.

선생의 아호는 소불(笑佛)

"자네 경주에서 좋아하는 유물을 차례로 대보게"

"석굴암,석가탑,고선사탑,감은사탑,삼화령 애기부처,태종무열왕릉 거북이,

에밀레종 비천상,남산 용장사터 마애불,불곡 감실부처님,

삼릉계 마애불, 보리사 약사여래상 ....... 이정도 이겠네요

그런데 소불선생은 한참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자네 장항리 절터 가보았나?"

"아니요"

"자네 진평왕릉 가보았나?

"아니요"

"자네 에밀레종 치는 거 직접 들어보았나?"

"아니요"

"자네, 경주를 말하려면 꼭 이 세가지를 잘 음미해야 할 걸세.

신라 문화의 품격을 알려주는 것은 바로 이 세가지일세."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중에 [폄] 

진평왕은 13살에 왕위에 올라 54년을 재위한 가장 오래한 왕이다. 신라가 삼국의 패권국가로 발돋음 하기위해 주춧돌을 놓았다.

신라의 국운이 진평왕에 와서 꽃을 피웠는데, 그의 뒤를 이어 선덕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며,그가 키운 여러 인재들이 여왕의 시대를, 잘 보필했고

김춘추라는 불세출의 명군으로 이어져 삼국통일의 위엄을 이루게 되었다.

신라 진평왕릉 비석.

빗속의 쑥부쟁이.

봉분에는 아무런 치장이 없다. 왕릉으로서 위엄을 잃지않고,소담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고 있다.

작은꽃 들의 향연.

화려해야 눈에 들어오고,장식이 많아야 휘둥거래지는 안목으로는 진평왕릉의 격조가 잡히지 않는다.

그런 요사스런 문화적,사회적 분위기 에서는 절대로 진평왕릉 같은 유물이 탄생하지 않는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 멀리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조망된다.

요번 태풍이 지나가고 가면, 황금벌판으로 물들겠지...

농로사이의 도로따라 내려간다.

의상사 방향으로 이동.

황복사지 주위에는 문화재 발굴중이다.

예전에 황복사지 가람이 웅장하고 크다는것을 알수있다.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692 년에 세운 탑이라 한다.

경주 황복사지 안내문.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탐의 내부에서도 2점의 국보급 문화재가 나왔기에 이 탑의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수 있다.

진평왕릉과 마주보고 서 있다.[폄]

다시 진평왕릉을 경유하며 양지마을에 들어선다.

양지마을 한옥촌.

전 홍유휴 설총묘 이정표.

보문마을 버스 정류장.

소나무 숲 아래 묘소가 보인다.

설총은 신라 경덕왕때 학자이며,아버지인 원효대사와 어머니인 요석공주이며 출생시기는 태종 무열왕 시대이다.

신라 유학의 종주이며,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 이다.

홍유후 설선생 휘총 지묘.  [이두를 정리,향찰을 집대성 하였다]

경주및 순창설씨 후손들에 의해 ,상석과 묘비가 설치 외곽에 철책이 설치되었다.

전 홍유후 설총묘 안내문.

고려 현종1년에 홍유후 라는 시호를  추종 받았고, 문묘의 동무에 최치원과 함께 배향 되었다.

경산에서는 삼 성현 중의 한 분으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홍유후 묘소옆의 하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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