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사기에 의하면 관산성전투는 백제와 신라 간의 전투 중 가장 유명하며 또 기록상으로 삼국시대 전투 중 가장 자세
하게 기록된 전투다. 흔히 백제 성왕의 죽음으로 잘 알려졌다. 4세기 후반 때처럼 백제, 가야, 왜국 대 신라의 적대 구도가
다시 부활하였고,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후반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이어지는 후기 삼국 시대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전투다. 554년 7월, 관산성에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 건곤일척의 결전이 벌어진다.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아 국가 중흥을 이루려는 백제와 한강 유역 일대를 장악하여 한반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신라가 국운을
걸고 맞붙은 싸움이었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9,600명이 참살되었고 말 한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전투는 신라의 승리로 끝났고, 이 전투에서 백제 26대 성왕은 적군에게 목숨을 잃었고 약 3만 명의 백제군도 전사하였으며,
120년간 유지되던 나제 동맹이 깨어지게 되었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 패배의 후유증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반면 백제를 패퇴시킨 신라는 사방으로 영토를 넓히며 삼국 통일의 기반을 구축한다.
신라에 붙잡힌 백제 성왕의 목을 하급병사에게 베라고 한것도 부족하여 신라는 성왕의 목을 신라 왕궁 북청의 계단 밑에
묻고 신라 귀족들이 모두 밟고 지나가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나머지 몸은 백제로 반환되었다.
이에 분노한 백제측에서 기병을 이끌고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지만.. 성왕이 죽은 구진벼루 위쪽 관산성 아래에서 대패를
당하게 된다. 이후 의자왕때 백제군이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한후 김춘추가 가장 사랑했다던 막내딸과 사위의 목을베어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보내 성왕의 복수를 하게 된다. 결국 김춘추는 그 일로 한을 품고 굴욕을 참아가며 당나라의 협력
을 얻어와 백제를 멸하게 된다. 김무력 장군은 김유신 장군의 조부이며 부친은 김서현 이다.
백제 성왕을 붙잡아 죽인 전공을 세운 장군 김무력은 이후 초고속 승진을 한 기록을 여럿 확인할 수 있다.
551년 단양 신라 적성비나 553년 7월 《삼국사기》의 신주 군주로 김무력을 임명할 때 김무력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여섯째
등급인 아찬이었는데, 555년 세워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나 561년 창녕 척경비에서는 3번째 등급인 잡찬으로 관등이
3등급 승진했다. 거의 약 2년 만에 3관등 승진인데 신라의 다른 기록을 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3단계 승진은 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한 전공을 인정받은 듯 하다.(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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