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이 제휴하여 결성한 혁명단체였다. 이 단체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1917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7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가출옥하였다. 이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8.15 광복후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미군정청경상북도 상임고문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앞서 경상북도 선거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임되었으며#1949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경상북도 위원장 및 조사관을 역임했다 (폄)
다시 하얀비석에 독립운동가 정운일 선생묘소 를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운일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본래 대구광역시달성군가창면오리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를 2007년 10월 16일국립대전현충원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했다.(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