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번에 카메라 고장으로 석조 마애불상을 담지옷한 아쉬움에 재 방문 한다. 칠곡중앙대로 5구간중 일부도로 를 지난다.
불교유적지와 연관을 지울수 있는 마을 이름이다.안양정토를 줄여 안양, 극락정토와 같은 뜻이다.
석조 마애불 안내표.
명봉산 아래의 안양 마을.
마애불상군과 요사체.
다리를 건너니 일본식 형태의 석등이 일주문 처럼 서 있다.
스님 한분이 기거하는 요사체 이고 그 흔한 절 이름도 없고, 마애불외에는 다른 불상도 모시지 않는다.
병풍모양의 암벽, 전면에 높이 7m.길이 20m 화강암벽의 마애불상이 나타난다.
마애불이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하고 앉아 있다.
보살상.
미륵반가삼존상.
우리나라에서 가장많은 불상이 조각된 읍내동 마애불상.당국의 무관심으로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다.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한번 방문하기로 하고 이동 한다.
선각9층탑.
선명 하지않아 모르겠음.
육안으로 봐서도 암반 상층부의 흙이 무너질듯하고, 막을수 있는 보호망이 필요하다.
위덕대학 발굴팀에 의하면,모두 33점의 불상이 새겨져 있어 29개의 경주남산 마애조상군의 상보다 4개가 많은 국내 최대의 불상군이다. 비록 그 크기는 작다만...
7세기초의 작품치곤 이목구비가 분명하고,신체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신문보도에 차차 알려져,문화재 관련기관 일본의 학자들도 다녀 갔다고 한다.
국내에 있는 마애불은 대부분 문화재로 지정 받아 나름대로 보호를 하지만 이곳은 사각 지대 이다.
관계당극은 하루속히 문화재로 지정하여 더 이상 손상되지 않도록 보존에 만전을 기했으면 한다.
경주남산 마애조상군중 일부.[폄]
청주 양씨가 머물렀다는 영가좌.
마애불을 중심으로 수많은 불상, 보살상,승려상, 선각9층탑이 새겨져 있다.
포대화상과 동자승
6.25전쟁때의 총탄의 흔적
소담스런 장독대.
연꽃에 붙여진 신도들의 이름. 커피 한잔을 마시고 이동 한다.
함지산 아래의 아파트 .
칠곡 경북대 병원.
국우동 탱자나무.
국우동 탱자나무안내문.
기념물로 제 10호 지정.
400년 나이로 추정되는 탱자나무3그루.
밑둥치 둘레가 1.5m에 이른다.
국우동 담장옆의 탱자나무.
위쪽에 450년 느티나무.
도남동 도덕산 이 보이는 효성실버타운.
도남지아래의 느티나무.
보호수 안내문.
겨울 태양이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
마을입구에서 수호신이 되세요.
도남저수지.
도남동경로당.
도남재 전경. 정선에서 성주 팔거의 국우리 도덕산 아래로 이거.곧 팔공산의 남은 기슭이고 동수싸움터와 가까운곳 이다.
도남재 편액.
칠곡출신으로 임진왜란시 창의한 우헌 전민련의 소요처 인 도남재.
광릉인 이상석이 쓴 도남재 기문과,5대손 시현이 쓴 시문 현판이 걸려 있다.
우물과 이충사 사당이 있다.
정선전씨 후손 우헌공께서 고려개국공신 충렬공 전이갑,충강공 전의갑 쌍둥이 형제의 순절에 미루어 가슴 아파하며 시를 지었는데 "팔공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 산은 고요하고 흰 구름만 두둥실 떠가네". 는 구절이 있었다. 두 충신의 사당을 집 뒤에 세우고 늘 사모 하였다.
이충사 유허비. 팔공산 집단시설지 내에 순절비가 세워져 있고,가창 행정리 마을 입구에 한천 서원에 모시고 있다
도남재 배롱나무.
도남마을의 낭만캠프장.
도남동 입구의 느티나무.
석양노을 빛.
실버타운 입구의 소나무 노거수.
용짬뽕에 반주를 깃들이고
관음공원의 관음루 야경.
밝은날의 관음루.
칠곡의 역사를 담은 새 현판.
일부 수정을 한 구 현판.
관음공원 남쪽 도로변옆 "정절부김씨정려비". 비문은 성리학자 창령인 기헌 조병선이 지었다.
본관이 김령으로 성연의 딸이다.19살되던해 혼인을 정해 신랑이 초레식에 갑자기 위독. 행례를 마치고 집에서 신랑이 죽자 자결하려했으나, 미수에 그쳐 빈소를 치려 대상을 마치고 시부모를 잘 봉양.맏동서의 미숙아를 길려고,친정모가 개가의 뜻을 비추자 바로 시집으로 내려왔다.
그는 아이에게 "시집을 가서 그 집을 세우지 못한것이 너무 원통하다'고 자주 말을 했다.이 일이 나라에 알려지자 정려가 내려졌다.[1905년]
그 후 세금면제 누차상을 주려 했으나 사양. 81세 병이 깊자"패물을 내 몸에 걸치지 말고 이대로 묻어달라" 유언을 남기고 돌아 가셨다.
이웃과 친척들이 비각을 세우고 비를 세웠다. 지금은 방치되어 있어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