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칠곡은 교통의 요충지이자 조선 시대 영남대로의 거점지역이었다.보부상,군인,관리는 물론 많은 물자의 교류가 있던 팔달진(八達津)이 있었다.그러나 늘 배를 띄워 강을 건너야 했다.이에 판관 서유교가 사비(私費)로 석량(石梁)즉 돌다리를 놓아 불편을 해소했다.그 고마움에1851년(철종2) 10월 서중면(현,원대,조야,노곡,부암,외비,내비,평리동)주민들이 빗돌을 세웠다[폄]
도감 [보를 관리하는 책임자] 김정유 송덕비.
보(洑)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하천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가로막아 높아진 수위(水位)의 물을 이용하기 위해 만드는 구조물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용도를 위해 건설된 보는 홍수가 날 때마다 무너지거나 유실되어 다시 고치고 수리를 해야 했다.따라서 보를 유지 관리하는 것은 어렵고 뿐만 아니라,확보된 물을 적기에 각 필지에 골고루 배분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도감 김정적은 이 일을 공평무사하게 했다.이에 주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빗돌이다.[폄]
가로수들이 은행나무 숲을 이루고 있다.
샛노란 은행잎.
금호강의 억새 군락지.
사수동,금호택지지구와 연결된 와룡대교.
사수동 금호지구 신 도시.
와룡대교[사장교]
방천리 방향으로 빠져나와 와룡대교로 라이딩.
이곳은 현재 개발중인 신 도시이다.
LH 천년나무1단지 아파트.
와룡대교 진입로 4거리.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독일 툿찡모원을 중심으로 로마에 총원을두고,서울 대구 수녀원 본원[프리오랏]이 속해있다.
쌍둥이 전원주택. 우애깊은 형제들이 살고 있을까?
이곳으로의 버스는 204번.북구4번,급행7이 운행된다.
팔달동 장태실길 옆의 재실.1975년에 건립된성주배씨 재사 귀후재
귀후는 논어 학이편의 "상례를 삼가고 먼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두터운 곳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연원을 두고 있다.
느티나무의 위용.
고목은 숱한사연을 남긴채 밑둥치는 빈 공간을 남기고...
느티나무는 창고와 함께 공생.
아주 선명한 그린벨트표시석.
잠산-수리봉-매봉-태복산 등산로.
등산로 진입로 데크.
주위로는 암벽이 자리잡고 있다.
대백 인터빌 아파트 옆에는 대구읍성을 지을때 ,돌을 채취한 채석장이 남아있다.
1735년[영조11]경상도 관찰사 민응수가 큰 고을을 지키는 성이 없다하여,스스로 찾아 채석할 장소를 찾다가 팔달동 일대 돌산을 찾았다 한다.
축조를 쌓기도 하였다. 조정에 건의하여 6개월공사끝에 4대문 동문[진동문],서문[달서문],남문[영남 제일관],북문[공북문] 동, 서에 2개의 암문[동소문,서소문]을 완공 하였다.
대구읍성 채석장 흔적.
읍성이 헐리며서 중심점을 뽑아, 이곳에 모은 삼각점 표지석인지 모르겠네요
이곳도 채석장이 아닐까?
주위의 돌을 받치고
태전 삼거리의 국토확장공사준공기념비.국도 4호선과 우,국도 5호선이다
초대 대통령이신 이승만 박사의 흔치않은 친필휘호 이다.
별이 새겨진 독립문 모양의 비
1952년에 세워진것으로 추정.전쟁중에 공사한것으로 보아 상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로 인지 알수 있다. 36분의 순직영령.
뒤쪽비문은 마모되어 내용을 알수 없다.
빗방울이 조금씩 날려 늦은 점심을 한끼로 때운다.
참, 살기 어렵다! 어느 노동자의 외침.
도시철도3호선 구암역.
이사장 댁.
찬 바람이 많이 부는가 봅니다.
재 건축이 되길 빕니다.
운암역 사.
자전거 전용도로 시작구간.
천년의 이름을 간직한 팔거천.고려 현종9년[1018]에 팔거라는 이름이 세상에 빛을 받는데,유구한 세월에 회자되어 남아있는것이 팔거산성과 팔거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