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효 대사의 출생과 수행 원효(元曉)는 스님으로서 쓰는 법명이다. 법호는 화정(和靜), 속성은 설씨(薛氏), 초명은 서당(誓幢)이다.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지금의 경산군 자인면)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10세에 출가하였는데 남달리 총명하여 출가 때부터 스승을 따라 경전을 배웠다. 성인이 되어서는 불법의 오의(奧義)를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다. 스님은 경학뿐만 아니라 유학(儒學)에 있어서도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 이었다. 고구려 고승으로서 백제 땅 전주 고대산에 주석하고 계신 보덕 화상(普德和尙)의 강하(講下)에서 <열반경>, <유마경> 등을 수학하였다. 영취산 혁목암(靈鷲山 赫木庵 : 지금의 통도사 산내암자)의 낭지(郞智) 화상에게서도 사사했으며, 당대 최고의 신승(神僧)인 혜공 화상(惠空和尙)에게서도 사사했다.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원효는 34세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 현장 법사와 규기 화상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옥에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왔다. 10년 후 45세 때에 두 번째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바다로 해서 입당하기 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는 도중 비를 만나 산속에서 길을 잃고 해매다, 겨우 토굴을 찾아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다. 갈증이 나 토굴속에서 고여 있는 물을 떠 마셨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 무덤이었으며 물을 떠마시던 그릇은 바로 해골 이었다.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 하룻밤을 더 지내게 되었는데 이에 귀신의 작란(作亂)에서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다. "마음이 생기면 만물의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면 무덤, 해골물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구나." 즉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一切唯心造)’는 유심(唯心)의 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활연대오를 한 스님은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친 사람으로서 또는 거지행세를 하며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포교에 들어갔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화엄경>을 주석하였다. ▲ 요석공주와 3일간의 사랑, 그리고 파계 원효가 하루는 미친 듯이 거리에서 외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줄 건가, 하늘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 誰許沒柯斧爲斫支天柱(수허몰가부위작지천주)" 라고 하니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만, 태종 무열왕이 그 노래를 듣고 뜻을 알았다고 한다. 무열왕이 말하기를 "원효가 아마 귀한 집 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구나. 아버지를 닮아 큰 인물이 되면, 나라에 더 큰 복이 어디 있으랴." 하였다. 즉, 자루 빠진 도끼는 ‘과부’를 뜻하고, 하늘을 받칠 기둥은 국가의 인재를 뜻하는 것이었다. 적당한 신부감을 구하던 무열왕에게 좋은 묘안이 떠올랐다. 이 때에 백제와의 전투에서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둘째 딸 요석궁주가 떠올랐던 것이다. 원효는 워낙 박식하고 뛰어난 고승이라 자신이 자주 조언을 구하는 까닭에 인연도 있었고 공주 역시 그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한 번은 공주가 그를 위해 승복과 모란꽃을 선물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무열왕은 궁중의 관리를 시켜 원효를 불러 들이라고 명하였다. 그 관리가 명을 받들어 그를 찾으려고 즉시 남산으로부터 문천교(월정교)에서 그를 만나니 짐짓 원효를 다리 아래로 떠밀어 옷을 적시었다. 관리가 원효를 대궐로 인도하여 옷을 갈아 입히고 젖은 옷을 말리고자 하였다.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게로 원효는 대궐에서 3일 동안 공주와 함께 지냈다. 승려의 신분으로서는 파계였으나, 인간 원효에게는 정말 속세에서 한 번 뿐인 꿈같은 나날이었다. 3일이 지난 후, 아무도 모르게 궁을 빠져 나왔다. 그 후 요석공주에게 태기가 있었고 10달이 지난 후, 신라 10현인 중 한 분인 "설총"을 낳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 ▲거리낌이 없는 삶, 대중속에 파고 들며 포교 스님은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파계하고 자기를 ‘아랫 것 중의 아래’라는 뜻의 복성거사(卜姓居士) 혹은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며 무애행을 폈다. 즉 항간에 나가 표주박에 걸림이 없다는 ‘무애(無碍)’라는 글을 새겨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며, 거지나 창기들을 비롯한 하층민중들과 더불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염불(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을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교화하였다. 이 때부터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화엄경>의 ‘모든 것에서 거리낌 없는 사람이라야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벗어날 수 있다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스님의 오도적 삶을 크게 확대하고 사상의 깊이를 심화시켰으며, 오로지 일심사상으로 돌아가 널리 중생을 이익 되게 하였던 것이다. <자료/ 현대 불교미디어센터> 소요산은 이같은 전설이 얽혀있는 있는 산이다. 역사를 음미하며 아내와 함께 오르는 소요산은 그래서 의미가 깊게 다가오는 곳이다. 원효대사가 대중속 포교를 하며 수행 정진하던 이 산에, 요석공주가 아들인 설총를 데리고 머나먼 이곳까지 찾아 '애틋한 부부애' 를 보여 주면서 후세에 더욱 유명해 졌다. 등산로 계단을 오르면서 아침에 아내와 겪었던 작은 일들을 되새기며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미안했던 나의 심정을 아는지, 아내는 말 없이 산으로 오르며 등산객들과 보폭을 맞추기에 바빴다. 자재암으로 오르는 길에는 계단들도 참 많다. 그 옛날 남편 원효를 찾아 어린 설총을 업고 험준한 이 계곡을 찾았던 요석공주는 심정이 어떠 했을까? 여기 계신 스님들은 얼마나 이곳을 오르며 수행을 할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이끼가 낀 돌 계단도 운치를 더해 주었다. 올라야 할 곳은 많고 갈 길은 먼데, 이끼 낀 돌계단을 잠시 둘러보니 '낭만'이 동<動>하는 심정이 된다. 그리고 정상의 오름에서 머물며 생각해 본다.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속세의 생' 과 스님의 '구도의 생' 이 저기 돌 계단과 함께 갈라지는가 보구나 " 하고. 계단으로 채워진 역사의 고갯길. 세월과 함께 수백번도 변했을 소요산만 말없이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 을 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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