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칠곡은 교통의 요충지이자 조선 시대 영남대로의 거점지역이었다.보부상,군인,관리는 물론 많은 물자의 교류가 있던 팔달진(八達津)이 있었다.그러나 늘 배를 띄워 강을 건너야 했다.이에 판관 서유교가 사비(私費)로 석량(石梁)즉 돌다리를 놓아 불편을 해소했다.그 고마움에1851년(철종2) 10월 서중면(현,원대,조야,노곡,부암,외비,내비,평리동)주민들이 빗돌을 세웠다[폄]
도감(보를 관리하는 책임자) 김정유 송덕비.
보(洑)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하천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가로막아 높아진 수위(水位)의 물을 이용하기 위해 만드는 구조물을 말한다.그러나 이러한 용도를 위해 건설된 보는 홍수가 날 때마다 무너지거나 유실되어 다시 고치고 수리를 해야 했다.따라서 보를 유지 관리하는 것은 어렵고 뿐만 아니라,확보된 물을 적기에 각 필지에 골고루 배분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도감 김정적은 이 일을 공평무사하게 했다.이에 주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빗돌이다.[폄]